스타트업은 평균이 실패다. 100개 기업이 설립되면 태반이 문을 닫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업계획서라고 해도 그대로 실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행 과정에서 실패가 수반되고 그에 따라 바뀌어 실현된다.

실패가 경험이 된다고 하지만 몰입한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최정서 바비디 대표는 사업 실패 여파로 안면신경마비가 와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람이다. 그 여파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실패가 후일 특별함으로 바뀌고 기회가 되는 경험을 한다.

최 대표는 “마음대로 안 된 게 너무 많았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어그러진 경우가 다반사였다. 실패를 겪을 당시에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후에 그것이 예상치 못한 기회로 찾아왔다. 그 기회들이 연결되어 지금의 바비디 창업까지 이어졌다.”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분명한 건 너무나 아프고 힘든 실패의 벽도 끝이 아니라는 거다. 지금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면 실패하더라도 그게 미래에 선물이 될 수도 있다.”라고 전했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주최로 지난 17, 18일 양일간 개최된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행사에 최정서 대표가 연사로 나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하 발표 내용 전문 정리.

한국에서의 커리어 키워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지난 20년을 10년씩 구분해 보면, 앞선 기간에는 한국에서 스타트업 쪽에서 계속 커리어를 쌓았다. 작은 회사에서 영업도 하고, 공장 관리도 하고, 내 사업도 세 개 정도 했다. 그중에 두 개는 망했고 마지막은 매각했다. 그러고 뒤 10년은 미국에서 MBA를 하고 이베이와 페이스북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지난 6월 ‘바비디’를 창업하면서 다시 창업 정글로 돌아오게 됐다.

내가 맨 처음에 일을 배웠던 사장님은 보험왕 출신이어서 엄청 강성이었다. 하루 목표를 못 채우면 전 직원이 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가서 영업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목표를 맞춰야 됐다. 돈이 떨어지면 남대문 시장에 가서 600원짜리 요요를 사와 길거리에서 팔아 보름 만에 3천만 원 캐시를 만든 적도 있다. 당시에는 내용증명을 버릇처럼 썼고 신고도 많이 당해서 경찰서도 여러 번 갔다. 살아남기 위해서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던 호전적인 시기였다.

내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IT기업이었지만 아주 오래된 아반떼 차량에 동대문 새벽시장에 나가서 빌려온 의류를 꽉 채워 넣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품평회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안돼서 문을 닫았고, 그 충격 때문인지 안면신경마비가 발병했다. 왼쪽 얼굴이 완전히 마비되어 병원에 누워 있는데 가족이 많이 달라져 있는 게 보였다. 와이프는 많이 말랐고 첫째 아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이 성장해 있었다. 당시 나는 집에 옷만 갈아입으러 들어갔기에 가족의 변화를 전혀 신경 못 쓰고 있었다.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하면 많이 배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패를 통해서 내가 조금은 성장했을지 몰라도 그게 주변에 얼마나 민폐인지, 사회적인 코스트를 얼마나 많이 발생시키는지는 잘 몰랐다. 이후에도 한 번 더 사업을 했지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던 시절이다.

실패가 특별함이 된 첫 경험을 하다. 

세 번째 사업을 매각하고 미국에서 MBA를 했는데, 실패가 특별함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기이다. 내가 옛날에 했던 삽질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얘기가 된다는 걸 경험하기 시작한 거다.

MBA는 보통 9월부터 이듬해 인턴십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력서를 쓴다. 나도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다. 200여 개 회사에 지원했는데, 복사하고 붙여 넣는 게 아니라 그 회사에 맞춰서 써서 지원했다. 자기소개 같은 경우는 자다가도 일어나서 해도 2분 3초에 끝내게 말할 정도로 연습을 했다. 이후 80번 인터뷰를 했는데 어느 회사도 오라는 곳이 없었다. 3, 4월에 다른 사람들은 다 오퍼가 몇 개씩 왔는데 나는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자포자기하며 81번째 인터뷰를 했던 이베이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관이 내가 동대문에서 물건 사입해서 돌아다니며 고생했던 경험을 굉장히 흥미롭게 봐줬다. 이베이 패션 팀에서 의류를 분류하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인턴십인 것도 있었고, 시장 바닥에서의 경험이 독특하다고 평가된 거다. 나한테는 굉장한 흑역사였는데 좋게 해석되어 이베이에서 오퍼를 받는 배경이 됐다. 정말 숨기고 싶었던 실패가 누군가에게 되게 저의 특별한 면모로 해석된 첫 경험이었다.

위기의 순간 ‘수족관의 고래’가 되다. 

3년간 이베이에서 일하고 페이스북으로 이직해서 7년간 근무했다. 처음 4년은 너무 좋았고 그다음에 옮겨간 ‘커뮤니티 F’ 팀은 지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그런 프로덕트를 만드는 팀이었다. 팀원 모두가 프로덕트 미션에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내가 PM을 하며 엔지니어들에게 ‘일 좀 그만하고 쉬라’고 처음으로 얘기해 본 팀이었다. 팀의 결속력도 굉장히 강했고 평생 친구를 사귀었다. 그 당시에 나를 뽑아준 매니저도 너무 잘 맞았다. 돌이켜 봤을 때 페이스북에서 가장 행복했던 프라임 시기였다.

근데 나를 뽑아준 매니저가 다른 팀으로 떠나고 새로운 매니저가 오면서 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일단 그 사람과 잘 안 맞아서 티격태격했다. 페이스북은 근무한지 5년이 되면 한 달 정도 쉴 수가 있는데, 그 휴가를 보내고 회사에 돌아오니 내 자리가 없어져 있었다. 대신에 페이스북 프라이버시 관련 일을 그 매니저 밑에서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게 솔로 프로젝트로 나 혼자 하는 일이었다는 거다. 이전에는 하루에 미팅 10~15개씩 하고 사람들이 말 걸까 봐 피해 다닐 정도였는데, 그때부터는 아무도 말을 안 걸더라. 가끔 얘기하는 사람이 변호사였고 이메일도 몇백 개씩 오다가 2~3 개 왔는데 그나마도 단체 메일 아니면 스팸이었다. 가만히 혼자 책상에 앉아 있으니까 너무 외로워졌다. 혼자 일하는 게 처음이었었기 때문일 거다.

그 시기에 어떤 페이스북 직원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나한테는 굉장히 크게 와닿았다. 그 충격을 비롯한 복합적인 요인으로 우울증 증세를 앓기도 했다. 스스로 성격이 밝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우울증에 걸릴 거라곤 상상도 못 해봤다. 과거 사업이 잘 안됐을 때도 좀 얻어터진 느낌이 들고 말았는데 그때는 병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우울증이라는 인식을 못 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있다가 울기도 하고, 죽음도 생각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을 인지한 뒤에도 그걸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정신적인 나락으로 빠져든 시기였다. 이때 일기장에 썼던 제목이 ‘수족관의 고래’였다. 나는 고래고, 이전까진 관중들과 다른 고래들이 사랑해 줬는데 새로운 조련사가 와서 시키는 대로 안 했더니 문제가 발생했다고 본 거다. 이렇게 갇혀있으면 죽기에 바다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 합리화를 한거다.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하다.

당시 솔로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회사도 자주 안 나갔고 사람 만나는 것도 꺼렸다. 그런데 가끔 회사에 나갈 때 주변 동료들이 소소하지만 고마운 관심을 가져주더라. 식사하자고도 해주고  미국에서 내 이름이 초인데 “초이 내가 한국 음식점 갔더니 거기에 초이스 레스토랑이라고 쓰여있더라”라며 사진도 찍어서 보내주기도 했다. 근데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가슴속에서 큰 울림으로 터지는 거다.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너무 고마웠다.

보통 외롭고 우울할 때 전문가를 찾아가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동료들의 관심을 느끼면서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제3 요소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동료, 친구, 지인, 가족과 같은 사람들의 작은 관심을 모아주면 극복도 가능하다는 본 거다. PM 병이 발동해서 관련 프로덕트를 만들고 사업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매지컬리(magically)’는 기획이다.

회사에는 공개된 정보들이 많다. 캘린더도 있고, 테스크도 있고, 이메일도 있다. 그걸 잘 분석하면 이런 얘기가 가능해지는 거다. 예를들어 ‘초이가 한국 음식을 좋아하는데 이번에 어디에 코리안 바비큐가 생겼다더라. 가서 점심 먹자고 한번 해보자’라거나, ‘스미스는 디자인씽킹에 평소 관심이 많았는데 이번에 디자인씽킹 클라스가 생겼다. 스미스한테 이런 거 한번 얘기를 걸어보자’, ‘메리의 캘린더를 보면 일주일에 보통 미팅이 50개정도인데 이번 주는 80개나 된다. 엄청 힘들었을텐데 수고했다고 말을 건네보자’ 등 사람들이 서로에게 작은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그 순간들을 AI가 모아서 알려주면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서로에게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봤다. 그 아이디어를 들고 해커톤에 나가서 우승한 뒤 코파운더를 찾고 본격적으로 사업 준비에 돌입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며 불확실성이 커지자 코파운더가 떠났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나는 다시 수족관의 고래로 돌아가게 됐다.

 

비영리 법인 ‘밀포워드’를 만들다. 

매지컬리 프로젝트가 무산될 때 즈음 회사 인사팀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하는 프라이버시 관련 솔로 프로젝트를 그만두고 45일 안에 다른 팀을 찾거나 팀을 못 찾으면 회사에서 떠나라고 통보가 왔다. 내가 회사 평균보다는 잘해왔다고 생각했기에 그 통보를 받고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났다. 가서 따져 물어봐도 설명도 못 들었고 옮길 수 있는 팀도 몇 개 없었다. 본의 아니게 시간이 많아지게 됐다.

가만히 있는 건 싫어서 코로나19로 식당 운영이 힘들어진 지인을 돕기로 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려고 아는 동생이랑 주문 사이트를 만들었다. 그걸 론칭하는 날이 금요일 밤이었고 모여서 작은 파티를 했는데, 거의 울분을 토하듯이 술을 마신듯싶다. 혼자 양주 한 병을 거의 다 비웠고 다음날 속도 비웠다. 일요일 아침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자괴감이 들었다. 어떤 사람은 백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상공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데, 나는 술이나 먹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좀 그랬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리서치를 시작했다.

우선 요즘 사람들에게 뭐가 필요할지를 찾아봤는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마주친 글이 인상적이었다. 요약하자면, 기부를 받아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레스토랑에 보내고, 레스토랑은 그 기부금으로 음식을 만들어 고생하는 의료진에게 도시락 배달을 해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글 말미에 “근데 이거 너무 힘들다. 누가 좀 자동화 좀 달라.”라고 쓰여있었는데, 자동화란 부분에 마음이 꽂혔다. 내가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지만 그래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면서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게 자동화가 아닌가 싶은 거다.

식당 사이트를 만든 사람들과 함께 페이스북에서 실험 삼아 관련 펀드레이징을 한번 해봤다. 처음에 2천 달러로 정했는데, 2시간 만에 완료가 됐고, 3천 달러로 올렸는데 3시간 만에 끝났다. 15일쯤 지나니까 한 3만 달러가 모이는 등 엄청나게 뜨거운 반응이 있었다. 댓글 반응도 좋았다. 사람들의 칭찬에 부끄러우면서도 당시 내게는 큰 힘이 됐다. 댓글 하나하나를 20분마다 꺼내서 본 것 같다. 인생의 바닥을 치던 시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댓글 하나하나가 내 마음의 긍정적 양분이 됐다. 그 일을 하면서 내가 제공하는 것보다 받는 게 훨씬 많았다.

기부금이 많이 모이면서 계속 프로젝트로 해야 될지 아니면 비영리 법인을 세워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나는 사업을 하고 싶었고, 비영리 법인을 만들면 사업을 하는 데 짐이 될 것 같았다. 근데 이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를 깨닫고 정말 많이 부끄러웠다. 할 때 안 할 때 장단점을 내 제 기준으로만 생각만 한 거였다.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바람이 불고 있을 때 돛을 펴고 배를 띄워서 일단은 맡겨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밀포워드’라는 비영리 법인을 회사를 다니면서 세웠다.

밀포워드는 지금 배고픈 아이들도 돕고 있다. 100% 발런티어 자원봉사자로 돌아가는데, 특히 평생 친구인 ‘커뮤니티 F’ 친구들이 많이 와서 도와주고 있다. 자원봉사에 뜻이 있다면 많이 연락해 달라.

사회적 기업에 집착했다. 

한국에서 창업자로만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심지어 이베이나 페이스북 같은 큰 회사들에서 10년 동안 있을거라곤 이전에는 상상도 안 해봤다. 사업을 하고 싶어서 10년간 크리스마스 때마다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1월에 VC 친구, 전문가 지인에게 검사 맡고, 2월에 포기하는 패턴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 사회적 기업에 집착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한 마지막 사업은 온라인으로 돼지고기를 파는 사업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병행했다. 기억에 남는 건 수제 소시지를 만들어서 남으면 고아원에 기부를 한 거다. 그런 활동이 매출이 잘 나올 때는 괜찮았지만, 장사가 안 될 때는 하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이익을 나눠서 돌려준다는 건 이 비즈니스 정글에서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모델이 이상적이라는 생각을 해서 그런 사업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한 사업 모델을 찾기가 어려웠다.

근데 밀포워드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리고 비즈니스를 제대로 한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관심을 안 두던 핀테크, 애드테크, AI 등 비즈니스를 열심히 살펴봤다. 어디에 돈이 많이 가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위주로 사업 고민을 시작했다.

바비디 창업 아이디어와 공동창업자를 찾다 

관심을 가지고 있던 AI 영역에서 아이디어를 찾고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사업계획서를 썼다. 그리고 작년 12월 27일 AI 전문가인 친구(바비디 배수현 CTO)에게 연락했다. 그 친구는 지난 10년간 내가 크리스마스 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가져가면 ‘알았으니 술이나 먹어’라고 냉정하게 평가하던 친구다. 그런데 그날에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10분도 안 되고 “정서야 같이 하자”라고 했다. “야, 너 미쳤어”라고 반응은 했지만 가슴이 너무 뛰기 시작하더라. 6개월간 여러 실험을 거치고 올해 6월에 바비디를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게 됐다.

바비디는 AI 모델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는 커뮤니티 기반의 플랫폼이다. 고객사의 AI 모델을 글로벌 커뮤니티와 함께 빠르게 테스트해 몰랐던 편향성을 찾아내고 보상해 주는 시스템이 특징이다. 약점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생긴 편향성 데이터를 공유하여, 기존의 AI 모델을 효과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공한다.

현재 미국이라는 큰 시장에서 하고 있고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래서 지난 4~5개월간 많은 일이 일어났다. 프리 시드로 약 23억 정도 투자를 유치했고, 미국과 한국에 사무실을 만들고 있다. 클로즈 알파 버전을 2주 전에 론치 했고 첫 커스터머도 생겨서 입금도 되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채용도 진행 중이다. 많이 지원해 달라.

실패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 

유명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이 2011년 다트머스 졸업식 축사에서 “1940년대 모든 코미디언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인 잭 배니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잭 배니가 되지 못했고, 그다음 세대는 모두 조니 카슨이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다. 그다음인 우리 세대는 모두 데이비드 레터맨이 되고 싶어 했지만 될 수 없었다.”라며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의 모습, 이상향에 도달하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가 누군지를 정의할 수 있고 그 실패 자체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라고 했다.

나는 이 얘기가 너무 와닿았다. 내가 동대문에서 고생했던 일이 누군가에 의해 특별한 경험으로 승화되어 새로운 기회로 연결되었고, 정신적으로 힘들고 우울증에 빠져서 회사에서 쫓겨날 상황이 됐을 때 밀포워드라는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밀포워드를 함으로써 비즈니스에 눈을 뜨고 현재의 창업으로 연결됐다.

물론 꿈보다 해몽이고 그렇지 않았어도 훌륭한 인생이 펼쳐질 수도 있었을 거다. 한 가지 분명한 거는 너무 힘든 실패의 벽이라도 끝은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근래 내가 좌우명으로 하고 있는 것이 ‘최선을 다하자’이다. 과거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정신으로 살았을 때는 가장 싫어했던 말이다. 최선을 다했는데 못했다는 건 변명 같았기 때문이다. 근데 사회에 나와 뭔가를 해보니 마음대로 안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지금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가 어떤 것이 와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것이 열어주는 기회에 오히려 호기심이 있다. 바비디도 그런 마음으로 만들어가고 있다.https://platum.kr/archives/175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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