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 중 하나이다. 그런 기준에서 영국은 2021년 세계 식량안보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안정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2021년 1월 1일 영국이 EU를 떠나면서 식량 공급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식량 생산과 공급에 타격을 받았으며, 러-우 전쟁사태로 인해 곡물 및 에너지 위기가 찾아오자 식량 안보가 주목받게 됐다. 식량 안보는 정치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기후, 토양 등 생산 환경의 변화 등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동향을 주시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민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은 안정적인 공급망이 구축돼 있고 정부에서 식량 안보 문제에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영국의 식량 공급망
영국 식량의 46%는 외부로부터 온다. 높은 식량 외부 의존도는 지정학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직접적인 공급망 쇼크를 가져오는 위험 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높은 의존도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공급망이 다변화돼있기 때문이다. 2019년 기준 한국의 식량 수입 비중은 미국 21%, 중국 15.4%로 단일 국가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영국은 한 국가로부터 11% 이상 수입하지 않는다. 브렉시트가 단행되기 전, EU에 속해있던 영국은 정책적·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70%가량의 식량을 EU로부터 수입해왔고 그 비중은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영국이 EU를 확실히 떠난 후부터 무역 대상으로서의 EU 매력도가 낮아졌고 1년 새 EU 식량 의존도가 8% 감소했다.
<영국의 EU 및 비EU 국가 식량 수입비중>
(단위: %)
[자료: GOV.UK]
국내 생산 또한 안정적이다. 영국은 식량 수요와 경작량에 따라 유연하게 수출입 비중을 조정하고 있으며, 경작 방식이 효율화되면서 급변하는 수요를 대응하기 수월해졌다. 그러나 기후변화, 과도한 경작으로 인한 토양의 질 저하 및 생물 다양성 파괴 등의 환경 문제로 영국의 경작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 일례로 2020년 때아닌 폭우와 가뭄이 번갈아 지속되면서 밀 생산량이 40%가 줄어든 적이 있었다. 밀 생산량은 2021년 들어 다시 회복됐지만, 예기치 못한 기후 변화가 식량 공급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에너지 위기로 심화된 식량 공급망 불안정
이처럼 식량 공급에 있어 안정성이 잘 갖추어진 영국이지만, 전례 없는 에너지 위기는 공급망에 막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켰다. 식량의 수급에 참여하는 주체는 생산자, 가공업자, 물류유통업자, 도매업자, 소매업자로 나누어져 있는데 문제는 각 단계에서 모두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생산자의 농기구 사용, 물류유통업자의 화물 운송, 도소매업자의 창고 운영 등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가 필요하지만 에너지 위기로 이 모든 과정의 비용이 올라가면서 결국 식량 생산량 감소와 가격 급등을 초래했다. 한 일간지는 에너지 위기로 내년 부활절까지 식료품 가격이 6%가량 상승할 것이라 분석했다.
최근 발생한 에너지 위기 외에도 영국에는 토양의 질 저하나 음식물 쓰레기 문제 등 식량 공급을 저해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식량 공급망을 위협하는 장기적인 요인1: 인구 증가와 토양 저하
출산율이 0%대에 다다른 한국과 달리 영국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인구는 현재 6700만 명이며 2030년 중반 6900만 명, 2045년에는 7100만 명에 다다를 전망이다.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더 필요함을 뜻하고 국가가 더 안정적인 식량 공급망을 구축해야 함을 의미한다.
<영국 인구 및 미래 전망치>
(단위: 백만 명)
[자료: 영국 통계청(ONS)]
필요한 식량은 늘어나는 반면 식량을 경작할 땅의 질은 저하되고 있다. 토양의 질은 풍식작용* 등 자연에 의해 저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삼림 벌채, 과방목, 집약 재배 및 공사 등 인간의 행위로 인해 저하된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토양 오염이 심화되는 경우도 있다. 1990년대 영국에서 연료로 쓰일 옥수수가 필요해져 옥수수밭에 보조금을 주기 시작하자 30년 새 옥수수밭의 면적이 3배가 됐는데, 옥수수는 토양을 침식시키는 속도가 빠른 탓에 넓은 면적의 토양 질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영국 옥수수밭 크기 변화 추이>
(단위: 1000헥타르)
[자료: GOV.UK]
최근 급격한 기후 변화도 토양의 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기후 변화 또한 온실가스 증가의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로 인해 야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토양 질 저하는 경작지의 사막화, 고유 기능 저하 등의 문제를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식량 생산을 감소시킨다. 영국의 식량 외부 의존도가 46%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54%의 음식이 자국에서 생산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인구는 늘어나지만 같은 면적의 토양이 생산할 수 있는 음식의 양은 줄어들고 있으니 장기적으로 식량 안보가 위험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주: 바람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의미
식량 공급망을 위협하는 장기적인 요인 2: 음식물 쓰레기
세계에서 생산된 음식의 1/3은 쓰레기로 돌아간다.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정부 발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은 매년 950만 톤의 음식물 쓰레기가 발생하는데, 그중 70% 이상이 가정에서 나온다. 즉, 먹을 양보다 과도하게 음식을 구매한 뒤,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버려진 음식물로부터 나오는 온실가스 또한 3600만 톤에 이른다. 2018년 기준으로 이 수치는 전체 영국 온실가스 배출의 8%를 차지한다. 식사량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멀쩡한 음식이 버려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한 온실가스가 다시 식량 공급을 감소시키는 기후 변화를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놀라운 점은 영국에서는 음식물 분리배출이 법적으로 요구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분리해서 배출하는 곳도 있지만 공동생활시설의 경우 대부분 음식물 쓰레기도 일반 쓰레기통에 버린 후 일괄 배출한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영국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 문제를 해결하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2023년 영국 전역에 음식물 쓰레기 분리배출을 법적으로 의무화할 예정이다. 지역 당국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차도마다 비치한다면 2029년까지 분리배출되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135만 톤으로 증가할 것이며, 125만 톤의 온실가스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정부는 2025년까지 음식물 쓰레기 배출량을 20% 줄일 것을 약속하며 음식물 쓰레기 처리에 있어 세계적인 선두 주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팬데믹 시기 식량 안보를 위한 영국 정부의 기민한 대응
여러 당면 과제가 있는 영국이지만, 식량 공급망 안정을 위한 영국 정부의 기민한 대응은 배울 점이 많다. 영국의 식량 공급망은 민간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의식주에 해당하는 영역인 만큼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결하고 있다. 특히 팬데믹 시기 식량 공급망이 크게 위축되자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식량 공급망 안정성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코로나19로 촉발된 봉쇄, 거리두기, 공장 가동 중지로 식품 업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봉쇄 조치로 인력 수급이 어려워짐에 따라 농경지나 목축지의 생산성이 저하됐고 공장 가동이 중지되면서 농가 운영에 필요한 물품 조달이 어려워져 경작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팬데믹은 영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닌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수입 증가 및 공급망 다변화의 어려움도 있었다.
영국 환경식품농무부(DEFRA)는 먼저 여려 협의체를 만들어 문제를 빠르게 파악했다. 식량공급망 비상연락망(FCELG, The Food Chain Emergency Liaison Group) 정기 협의회를 열어 식량 공급망 탄력성 및 안보에 대해 논의하고 공급망에 차질을 줄 수 있는 문제 요인들을 구체화했다. 팬데믹이 시작된 시점에는 식량 회복탄력성 산업포럼(FRIF, Food Resilience Industry Forum)을 열어 식량 공급망 중 운수와 관련된 문제를 파악해 지원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민간분야 간 효율적이고 빠른 소통을 위해 산업 분과별 미팅을 주도하기도 했다.
정부 주도의 기민한 문제 파악 덕택에 공급망 참여자의 니즈에 맞는 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 정부는 고수요 물품들에 대한 구매제한정책을 실시해 모든 농가에 장비 등 물품이 고르게 배분될 수 있게 했고 운송 관련 규제를 완화해 이전보다 식량이 빠르고 자주 공급될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플라스틱 가방 사용 제한 조치를 일시적으로 풀어 전염병 확산 가능성을 낮추는 데 일조했고 주요식량이 최우선으로 배송될 수 있도록 했다.
영국 정부의 식량안보정책
러-우 사태 발생 당시 정부는 비료 등의 생산비용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영국 정부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지속적으로 식량 안보 관련 사항을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문제 발생 시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한 토양 질 향상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환경적인 문제도 해결코자 노력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식량안보 해결책으로 자급자족을 내세우지 않는다. 영국에서 생산할 수 없는 식량에 대해서는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해 효율적으로 조달하고 대신 필수적인 식량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체 공급선을 확보할 것을 강조한다. 일례로 영국 정부는 현재 러-우 사태로 인해 수급이 어려워진 밀, 옥수수 생산과 관련해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과 거래를 지속하고 가격을 낮출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협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식량 안보 수호를 위해 취약국의 식량 위기 영향을 최소화할 방법 또한 모색하고 있다.
시사점
한국의 식량안보 순위는 세계 32위로 매년 순위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 밀 수출 제한, 팜유 수출 제한 등 세계적인 식량 수출 제한이 이어지고 있고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발표한 한국의 곡물 자급률이 20%임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는 현재 식량 안보 위기 속에 놓여있다. 우리 정부는 현재 부족한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으나 현 공급망 상황은 자꾸만 내리막길을 향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우리 정부의 식량 안보 수호를 위한 직접적인 움직임이 기대된다.
제레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엔트로피’에서 우주의 에너지는 일정하며, 에너지는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방향,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설명한다. 이를 사회 현상에 적용하면 곧, 사회의 모든 현상이 결국엔 무질서(종말)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해석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땅을 경작해 식량을 생산하고 가공돼 소비되는 전 과정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미래의 식량 문제, 나아가 종말까지도 불러일으킨다. 에너지가 일정한 만큼 우리는 남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식량 안보는 개별 국가가 자신을 위해 수호해야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함께 손을 맞잡고 풀어야 하는 숙제이기도 하다.
자료: Uk Parliament, GOV.UK, DEFRA, ONS, KOTRA 런던 무역관 자료 종합
원문링크 | https://dream.kotra.or.kr/kotranews/cms/news/actionKotraBoardDetail.do?MENU_ID=70&pNttSn=196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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